• 2010/02/18 13:17


10년만에 아버님을 모시고, 고향에 다녀왔다. (부모님께서는 자주 다니셨다.)

어릴적 뛰어놀던 모습 그대로 일수는 없지만 나름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10년 전 모습과 비교 생각해 보면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이지만, 10년만인지....낮설고, 객지사람으로 바뀐 느낌이다. 

조상님들의 묘소와, 집, 친척들이 아직 살고 계시는 모습에서 한 때 이 동네 주민 또는 꼬마였다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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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도착하자, 바로 산소로 향했다. 할머니가 감을 좋아하셨다고, 아버님께서 서울에서 챙겨 내려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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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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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새해를 맞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와, 큰아버님 산소를 차례데로 돌고, 내려와 동네를 돌아보면서 어릴적 놀던 기억들에 


몇 컷의 사진을 찍었다. 


어릴적 

그렇게 크게만 느껴진 동네며,

그렇게 넓게만 느껴진 골목길이며,

그렇게 멀리만 느껴진 친구, 친척집들이 

이제는 한걸음에 다달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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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논이다.(저 멀리 우측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이 친구 성진이 집이다.)


어릴적 이곳에서 동네 선후배 꼬마(?)들을 모두 모아서 축구와 야구를 했던 곳이다.

벼를 베고, 남은 뿌리들 때문에 뛰면서 많이 걸려 넘어지고 힘들었지만....그 때는 참 좋은 구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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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에 차량들이 모여있는 곳이 마을회관이다. 


저 곳에서도 참 많이 놀았다. 잣치기, 숨박꼭질 등등...

마을회관 옆 파란색 기와건물 너머가 재근이라는 친구녀석의 집이고, 회관 뒤편이 종록이 집이 위치해 있다. 


이제 이런 시골길에도 아스팔트 포장이 깔렸다. 물어보니 작년 가을에 작업이 되었단다. 

아직도 전라도는 한참 뒤쳐진 곳들이 많다. 그런 이유로, 다른 지역 보다는 공기좋고, 인심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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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던 시골 골목길이다. 


이 길을 통하면, 친구들(한철, 인, 상희, 희숙)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우측 중간에 하얀색으로 만들어진곳이....벽보판이다. 

어릴적 이곳에 많은 벽보들이 붙여졌고, 


물론 동네 꼬마들에게도 좋은 낚서장소(?)였다. 


" 태상이가 누구를 좋아한데~~~"


흐흐흐 그런 장소....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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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에는 저수지가 2개가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하락동이라는 작은마을에 위치하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위 사진에서 흐르는 냇물을 제공하는 저수지

더운 여름날이면, 이 저수지에서 흘러 내려 이곳으로 흘러들어오는데 동네 츠자들이 밤에 수영을 하던 곳이였다.

물론 옷을 입고 풍덩....(당시에 다 큰 츠자들은 낮시간에 수영을 못했다.) 지금은 비키니를 입고 활보를(?)를 하지만....말이다. 





  • 2006/10/04 10:48

    순천 김씨 (順天金氏)

 

 1 > 시조 : 김 총[金摠]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순천(順天)은 전라남도 남동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 시대에는 함평이었으나  
     신라 때 
승평으로 고쳤으며, 1310년 순천(順天)으로 개칭하였다.

     순천김씨(順天金氏)는 신라 경문왕의 아들로 태봉국을 세운 궁예의손자 김총(金摠)이시조

     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가 인가 별감을 지내고 평양[순천의 옛지명]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을 순천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전객서령을 지낸 윤인

     (允仁)의 손자 유정(惟精)이 통정대부로 정주목사를 역임하고,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  

     다 그의 아들 승주는 초명이 을보(乙寶)였으며, 창왕때 풍주의 수령으로 나가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조선 정종(定宗)  때 추충익대좌명공신에 올랐다.  이어 공조판서와 평양부윤 등

     을 지냈으며, 태종 때 병조판서에 이르러 평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승주란 이름을 하사받았

     다.  

     특히 조선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명신 종서(宗瑞)를 들수 있다.  
     그는 
태영(台泳)의 손자로 출생하여 16세 때 문과에 급제, 세종이 즉위하자 여러관직을 지

     낸후 1433년함길도 도관찰사로 야인들의 변경침입을 격퇴했고, 육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장하였으며  그후 1453년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두아들 
승규(承珪)·승벽(承壁), 손자  만동(萬同)·조동(祖同) 등과 함께 격살되고 
     아우 
종한(宗漢)도 화를 입었으며,  승규의 막내 아들만이 어머니를 업고 도망감으로써 
     간신히 일가의 절손됨을 면하게 되었다.  

     작은 체구에 뛰어난 지략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오랑캐를 막기위하여  함경도 8진의 
     지세와 공수방법을 적은 [제승방략]이란 저서를 남겼으며, 호기가를  포함하여 시조 2수

     가  전한다.  

     가문을 더욱 중흥시킨 여물[汝물]은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신입 장군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가 충주 달천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으나 북상하는 적군을 막지 못하여
     탄금대에서 신입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한편 여물의 아들 [유]는 승문원의 벼슬을 거쳐  광해군 때 강계부사를 지냈으며,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승평부원군에 봉해지고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좌의정과 영의

     정에 올라  영국일등공신으로 순천부원군에 봉해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김씨(順天金氏)는 남한에 총 11,092가구,
     45,6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내유리

경북 안동군 풍천면 구담동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유능리

전남 해남군 해남읍 평동리, 산이면 구성리

     평남 순천군 선소면 남포리

전남 해남군 계곡면 여수리, 방춘리

     경북 문경군 가은읍 작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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